난 원래 걷는걸 좋아했다.
그냥 특별하게 뭔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걸어다닐때 시간이 제일 잘가서 였던것 같다.
여행가서도 할일이 없으면 그냥 걸어다녔다.
물론 말로는 걸어다니면 차타고 다닐때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볼 수 있어서라고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시간 때우기 좋아서 - 였음이 정확했던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시간을 어떻게 하면 잘 걸어다니면서 때울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한번에 2~3개일을 처리해 버리면 걸어다닐 이유가 없어지니 - 어찌됐든 명분은 필요했다.
물사러 한번 나갔다가 조금있다가 아침을 먹으러 다시 나가고 다시 동네 산책을 나가고 하는 식이였다.
- 아직은 멀쩡하네.
산을 한번 올라가볼까? 겨울산으로.
라고 생각했을때 어디를 갈까 정할때 기준도 역시 가장 많이 걸을수 있는 곳이였다.
지리하게 걸어서 지리산이라는 곳. 그중에서도 종주 코스는 정말 원없이 걷고 또 걷고 그렇게 걸을수 있는 코스였다.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인터넷에 조금 두드려보니 산행 초보고 지리산 종주를 그것도 1박2일에 한다는건 무모하다는 글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단한번도 못올라 갈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히말라야도 뛰어 올라가던 패기가 남아 있어서 일수도 있고 (그건 물론 20대 체력이 최고일때 이야기 지만...)
PT를 몇달간 하면서 내 하체 근육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일수도 있다. (그뒤로 6개월째 그대로인것은 함정이지만...)
어찌됐던 나는 성공할것이였기때문에 장비도 뭐 굳이 필요없었다.
여기저기서 대충 빌리고 정안되는건 마트가서 제일싼걸로 사고 (그놈의 스틱은 정말이지 최악이였다.) 그렇게 그냥 길을 떠났다.
- 형도 아직 멀쩡하네.
원래 종주코스 기본대로 성삼재까지 택시로 올라가려 했지만 눈때문에 못올라 간다고 했다.
밑에서 부터 올라가야 한다고...
우리 숙소가 벽소령이니 아빠는 의신마을에서 올라가라고 했다.
의신마을에서 쭈욱~~ 치고 올라가면 나오는게 벽소령이였다.
대충 거리를 보니 이건 세시간이면 올라갈것 같았다. (물론 나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기왕 지리하게 걸으려 왔는데 이렇게 가는건 너무 아쉬울것 같았다.
그래서 피아골로 갔다. 피아골에서 한 2km 올라가면 피아골 삼거리고 거기서부터는 능선을 타면 되니까.
- 아마 이게 마지막으로 웃는 사진이였을거야.
그런데 계산을 하나 잘못한게 있었다.
피아골 대피소부터 삼거리까지가 2km 였지
피아골 대피소까지 가는길은 우리 계산에 없었다.
가고가고 한참을 갔더니 왜 이제야 대피소일까.
설상가상, 아니 이건 정말 설상가상이 맞구나 반야봉일대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죽기살기로 삼거리까지 올라온 우리를 기다리는건 칼처럼 푹푹 찔러오는 찬 바람이였다.
30초만 서있어도 이대로 얼어 죽겠구나 싶은 기분은 처음이였다. 군대에서도 이런 기분은 느껴본적이 없었다.
땡땡하게 얼어붙은 김밥 덩어리를 추위에 벌벌 떨면서 대충 입에 구겨넣고 계속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 그 와중에도 날은 어찌나 기가 막혔는지..
죽을것 같았는데도 영하 20도 저멀리 넘어 반짝이는 남해바다를 본건 1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여행을 가도 사실 기억에 남는건 몇몇 장면들 뿐인데 지리산에서는 이 장면이 그중 하나였다.
내려오면 다른건 다 없어지고- 특히 걸어다니는 여행에서는 더더구나 그렇다. 가는길에 어땠더라? 희미한 느낌만 있다
아! 거기 정말 끝내줬어. 저멀리 첩첩 산중너머 남해 바다가 보이는데 그게 햇빝을 받으면 반짝반짝 빛나.
아니 그냥 좀 걸어가면 됐던것 같아. 그런 풍경은 아무데서나 아무때나 볼 수 있는건 아니잖아?
- 물론 이게 현실입니다. 하... 죽겠네...
- 뭐 형도 별반 다르진 않구나..
이렇게 속도 또 속아서 또가고
누가 물어보면 정말 좋다고 하고
그렇게 여행을 또 가게 되나보다.
물론 이번에는 불시착했지만. 그 불시착 때문에 또가게 되었으니까.
내려오고 나면 다 잊혀진다니까. 불시착이 어찌나 재밌던지.
거의 구르다시피해서 내려왔는데도 왜 그건 기억에 남아있지 않는지.
걸어다니는 여행은 왜 또 - 아 오늘하루도 재밌었어. 만 기억에 남고
발바닥에 잡힌 물집과 근육통은 응? 이건 왜 생겼지? 하고 모른척 하는지.